기록은 비었다
조직에 도움이 되지만 하는 사람의 평가에는 거의 반영되지 않는 일이다. 회의록 정리, 위원회 참여, 신입 챙기기, 부서 사이의 조율 같은 것들이다. 두 가지 성질이 겹쳐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누군가는 해야 하고, 하는 사람에게는 값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 일의 배분은 능력이나 적성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Section Ⅰ · The Task Nobody Wants아무도 원하지 않는 일
92%는 답하지 않았고
3.7%가 손을 들었다
어느 조직에나 명단에 없는 일이 있다. 회의가 끝나고 정리본을 쓰는 사람, 신입이 헤맬 때 붙잡고 알려 주는 사람, 두 부서가 어긋났을 때 사이에서 말을 옮기는 사람이 있다. 그 일이 없으면 조직이 멈추는데, 그 일을 한 기록은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린다 밥콕과 공저자들은 이 범주를 비승진 과제라고 부르고, 누가 그 일을 맡는지를 쟀다. 먼저 현장 자료가 있다. 한 대형 주립대학은 해마다 전 교수에게 대학 위원회에서 일해 달라는 메일을 보낸다. 승진은 연구로 결정되고 봉사는 거의 반영되지 않는다는 데 교수들 사이에 대체로 합의가 있는 상황이다.
회신의 분포가 이 일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 준다. 3.7%가 자원했고, 4.3%는 답장을 보내 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92%는 메일을 무시했다. 거의 전부가 모른 척한 것이다. 합리적인 반응이다. 하면 시간이 들고 안 하면 누군가 하기 때문이다.
자원한 소수에서 차이가 나타났다. 여성 교수는 7.0%, 남성 교수는 2.6%가 자원했다. 통계적으로 뚜렷한 차이이고, 직급을 통제해도 유지된다. 전체로 보면 작은 숫자들인데, 이 일이 해마다 반복되고 종류도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몇 해가 지난 뒤의 시간 배분은 크게 벌어진다.
여기까지는 관찰이다. 관찰만으로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여성이 그런 일을 더 좋아해서일 수도 있고, 거절을 더 어려워해서일 수도 있고, 요청을 더 많이 받아서일 수도 있다. 설명이 다르면 조직이 할 일도 달라진다. 그래서 연구진은 같은 상황을 실험실로 옮겼다.
Section Ⅱ · Not a Preference선호의 문제가 아니었다
같은 사람이
방에 따라 다르게 행동했다
실험의 설계는 현장의 구조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세 사람이 한 조가 되고, 정해진 시간 안에 누구든 한 명이 손을 들면 조 전체가 보상을 받는다. 손을 든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적게 받는다. 모두가 남이 해 주기를 바라는 일의 구조다.
혼성 집단에서 결과가 갈렸다. 남성의 평균 자원 비율은 23%였고 여성은 그보다 11.2%포인트 높았다. 현장 자료와 같은 방향이다.
두 번째 실험이 이 연구를 특별하게 만든다. 연구진은 똑같은 과제를 같은 성별로만 구성한 집단에서 돌렸다. 모두 남성인 조, 모두 여성인 조다. 여기서 격차가 사라졌다. 혼성일 때와 비교하면 여성은 자원 비율이 내려갔고 남성은 올라갔다. 그리고 조가 과제를 끝내는 비율은 구성과 무관하게 같았다. 누군가는 결국 손을 든다는 뜻이다.
이 결과가 설명 하나를 지운다. 선호의 차이였다면 방의 구성과 무관하게 유지됐어야 한다. 같은 사람이 방에 따라 다르게 행동했다면 원인은 사람 안에 없다. 저자들의 해석은 믿음이다. 여성이 더 수락할 것이라는 예상이 모두에게 공유돼 있고, 그 예상이 혼성 집단에서 작동한다. 남성은 누군가 하겠지 하고 기다릴 수 있고, 여성은 기다리면 아무도 안 한다는 것을 안다.
세 번째 실험은 요청하는 사람을 넣었다. 한 참가자가 다른 한 명을 지목해 부탁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요청은 여성에게 더 자주 갔고, 요청하는 사람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결과는 같았다. 특정 집단의 편향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뜻이고, 모두가 같은 예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해석과 맞는다.
마지막으로 저자들은 제3자에게 이 격차를 예측하게 했다. 사람들은 방향은 맞혔다. 여성이 더 자원할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크기는 크게 과소평가했다. 짐작은 하지만 얼마나 큰지는 모르는 상태다. 조직에서 이 문제가 오래 유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고, 다들 어렴풋이 알지만, 실제 크기를 아는 사람은 없다.
Section Ⅲ · Change the Room방을 바꾼다
사람을 바꾸는 대신
묻는 방식을 바꾼다
이 연구가 리더에게 쓸모 있는 이유는 기제를 집어냈기 때문이다. 원인이 사람의 성향이라면 조직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조언하고 교육하는 정도다. 그런데 원인이 예상이고 그 예상이 방의 구성에 반응한다면, 조직이 손댈 수 있는 것은 상황이다. 상황은 설계의 대상이다.
가장 단순한 설계가 자원을 받지 않는 것이다. 누가 하겠느냐고 묻는 질문 자체가 예상을 작동시킨다. 순번으로 돌리거나 무작위로 뽑으면 그 질문이 사라진다. 실험에서 조가 과제를 끝내는 비율은 구성과 무관하게 같았으므로, 배정 방식을 바꾼다고 일이 덜 되지도 않는다. 달라지는 것은 누구에게 쌓이는가뿐이다.
그다음은 서식이다. 어떤 일을 비승진 과제로 만드는 것은 그 일의 성질보다 평가 서식이다. 조율과 교육과 정리가 항목으로 올라가 있으면 그 일은 더 이상 공짜가 아니다. Vol. 57에서 측정이 목표가 되면 망가진다고 썼는데, 그 경고는 측정의 반대편을 면제해 주지 않는다. 아예 세지 않는 일은 조용히 한쪽으로 몰린다.
세 번째는 기록이다. 요청을 누구에게 몇 번 했는지 반년만 적어 두면 분포가 보인다. 제3자가 크기를 과소평가한다는 결과가 여기에 직접 쓰인다. 짐작으로는 알 수 없고, 적어 두면 알 수 있다.
이 문제가 지금 더 커지고 있다는 점도 말해 둘 만하다. AI가 보이는 산출을 싸게 만들수록, 남는 일 가운데 보이지 않는 조율의 비중이 커진다. Vol. 59에서 모두가 관리자의 일을 나눠 갖게 된다고 썼고 Vol. 61에서 빨라진 상류가 하류에 병목을 만든다고 썼다. 두 편이 가리킨 그 일들이 대부분 비승진 과제다. 문서를 쓰는 시간은 줄고 사람 사이를 맞추는 시간은 늘어나는데, 평가 서식은 여전히 문서를 센다.
읽을 때의 한계를 적어 둔다. 중심 증거는 실험실 연구이고 현장 자료는 한 대학의 위원회 사례다. 미국 자료이며, 한국 조직의 위계와 연차 관행은 또 다른 예상을 만든다. 성별이 이 연구의 축이었지만 기제 자체는 성별에 묶여 있지 않다. 누가 수락할 것이라는 예상이 공유되는 곳이면 어디서나 같은 쏠림이 생긴다. 많은 조직에서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이거나 가장 성실하다고 알려진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결국 떠난다. 하는 일은 많은데 평가에 잡히지 않으니 승진이 늦고, 승진이 늦으니 떠난다. 조직은 성실한 사람을 잃고, 남은 사람들은 그 일을 또 누군가에게 미룬다. 배분을 고치지 않으면 이 순환은 사람을 바꿔 가며 계속된다.
이 연구에서 가장 조용한 결과는 조가 과제를 끝내는 비율이 구성과 무관하게 같았다는 대목이다. 누가 하든 일은 된다. 그러니 조직이 배분을 방치하는 데는 아무 이익이 없다. 같은 일이 되면서 한쪽에만 값이 쌓이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물어야 할 것은 이 일을 누가 할 것인가가 아니다. 왜 매번 같은 사람이 하게 되는가,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묻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