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따지게 된다
머릿속에서 하던 일을 바깥 도구에 넘기는 것을 말한다. 전화번호를 외우는 대신 저장하고, 길을 기억하는 대신 내비게이션을 켜는 일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오래된 습관이고 대체로 이득이다. 달라진 점은 넘기는 대상이다. 지금은 기억과 계산을 넘어 무엇이 맞는지 가려내는 일까지 넘어가고 있다.
Section Ⅰ · Two Confidences두 개의 신뢰
무엇이 확인을
건너뛰게 만드는가
보고서 초안을 하나 받았다고 해 보자. 문장은 매끄럽고 숫자도 표로 정리돼 있다. 십 초쯤 훑어보고 "좋네요, 이대로 갑시다"라고 말한다. 이 짧은 순간에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렵다. 자료가 정확해 보여서 넘어간 것인지, 아니면 이런 자료는 대체로 괜찮았다는 경험 때문에 넘어간 것인지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소와 카네기멜런대 연구진이 2025년 발표한 조사는 정확히 이 순간을 들여다본다. 지식 노동자 319명에게 최근 업무에서 생성형 AI를 쓴 경험을 직접 적게 해 936건의 사례를 모았다. 그리고 각 사례에서 얼마나 따져 보았는지, 그때 힘이 더 들었는지 덜 들었는지를 함께 물었다.
결과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따져 보는 정도를 가른 요인이었다. 과제의 종류는 큰 차이를 만들지 못했다. 글을 만들든 정보를 찾든 조언을 구하든 비슷했다. 대신 두 가지 신뢰가 갈랐다. 하나는 AI가 이 일을 잘해 줄 것이라는 신뢰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이 일을 직접 할 수 있다는 신뢰다. 두 신뢰는 방향이 반대로 작동했다. AI를 신뢰할수록 따져 보는 정도가 낮아졌고(회귀계수 −0.69), 자기 자신을 신뢰할수록 높아졌다(+0.26).
두 신뢰가 반대로 움직인다는 점은 한 번 더 생각해 볼 만하다. AI를 크게 신뢰한다는 것은 그 일에 내 손이 덜 간다는 뜻이고, 나를 크게 신뢰한다는 것은 그 일을 내가 해 본 적이 있다는 뜻이다. 결국 따져 보는 힘은 그 일과 내가 맺어 온 관계에서 나온다. 해 본 적 없는 일일수록 받은 답이 맞는지 가늠할 재료가 없고, 그래서 더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이 결과가 불편한 이유는 따로 있다. 두 신뢰는 성격이 정반대인데, 겪는 사람에게는 똑같은 느낌으로 온다. 둘 다 '편안함'이다. 내가 잘 아는 주제라서 편안한 것과, 도구가 알아서 해 줄 것 같아서 편안한 것을 그 순간에는 나누기 어렵다. 그래서 확인을 건너뛴 자리에서도 확인했다고 느끼게 된다. Vol. 01에서 다룬 사각지대가 여기서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고 있다고 믿는 것이 문제다.
Section Ⅱ · The Practice You Skip건너뛴 연습
쉬운 일을 모두 넘기면
어려운 일만 남는다
같은 조사에서 사람들이 이미 나름의 기준을 갖고 있다는 점도 드러났다. 결과가 중요한 일에서는 꼼꼼히 확인하고, 사소하거나 반복되는 일에서는 그냥 받아들인다. 보고서가 외부로 나가면 원문을 찾아보지만, 회의 요약은 읽고 넘긴다. 시간을 아끼는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인다.
연구진이 걱정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중요한 일에서만 따져 보겠다는 전략은 따져 보는 능력이 평소에 유지된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그런데 그 능력은 평소의 작은 일들을 직접 해 보는 동안 자란다. 쉬운 일에서 연습을 모두 걷어 내면, 정작 중요한 일이 왔을 때 쓸 근육이 남아 있지 않다.
같은 지적은 40여 년 전에 이미 나왔다. 1983년 인지심리학자 리산 베인브리지는 「자동화의 역설」이라는 짧은 논문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자동화는 반복되는 일을 기계에 넘기고, 기계가 감당하지 못하는 예외를 사람에게 남긴다. 그런데 사람이 예외를 감당하는 힘은 반복되는 일을 직접 다루는 동안 자란다. 그래서 자동화가 잘될수록 사람은 가장 어려운 일만, 그것도 가장 준비가 덜 된 상태로 맡게 된다. 그래서 베인브리지는 자동화가 늘어날수록 사람의 훈련을 줄이지 말고 오히려 늘려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이 논문은 원자력 발전소와 항공기 조종실을 염두에 두고 쓰였다. 당시 자동화가 가져간 것은 손으로 하던 조작이었다. 지금 넘어가는 것은 판단이다. 2025년 조사에서 사람들이 '힘이 덜 든다'고 답한 비율을 보면 그 범위가 보인다. 지식을 다루는 활동에서 72%, 이해에서 79%, 적용에서 69%, 분석에서 72%, 종합에서 76%였다. 유일하게 낮은 곳이 평가로 55%였다. 무엇이 맞는지 가려내는 일만은 여전히 힘이 든다는 뜻이고, 동시에 그 일만 사람에게 남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조직에서는 이 변화가 개인보다 늦게 드러난다. 초안을 쓰던 사람이 초안을 검토하는 사람이 되는 데는 몇 달이면 충분하지만, 그 사람이 초안을 다시 쓸 수 있는지는 몇 해가 지나서야 확인된다. 그사이 산출물은 줄지 않고 오히려 늘기 때문에, 지표만 보면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Vol. 25에서 다룬 숙련의 문제와 겹치는 지점이 여기다. 다만 그때의 질문이 "어떻게 배우는가"였다면, 지금의 질문은 "무엇을 직접 해 보고 있는가"에 가깝다.
확신이 도구 쪽으로 기울수록 스스로 문제를 푸는 힘은 줄어든다. (Lee 외, CHI 2025 · 연구 요약 중에서)
Section Ⅲ · Supervision Needs a Standard감독에는 기준이 필요하다
살피는 사람이 되려면
내 답이 먼저 있어야 한다
연구진은 AI를 쓸 때 일의 성격이 세 방향으로 옮겨 간다고 정리했다. 정보를 모으던 일이 정보를 확인하는 일로, 문제를 풀던 일이 받은 답을 엮는 일로, 직접 하던 일이 맡긴 일을 살피는 일로 바뀐다. 세 가지 모두 한 단계 올라선 것처럼 들린다.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살피는 일에는 조건이 하나 붙는다. 무엇과 비교해서 살필 것인지가 있어야 한다. 초안을 보고 "이건 좀 약한데"라고 말하려면 강한 것이 어떤 모양인지 내 안에 있어야 하고, 그 기준은 그 일을 직접 해 본 시간에서 만들어진다. 기준 없이 살피면 남는 것은 인상이다. 읽기 편하면 통과시키고 어색하면 되돌린다. Vol. 41에서 본 것처럼, 이런 감독은 승인 기록만 남기고 판단은 남기지 못한다.
기준이 얼마나 빨리 흐려지는지를 보여 주는 실험이 있다. MIT 미디어랩 연구진은 2025년, 참가자 54명을 세 집단으로 나눠 같은 주제의 글을 쓰게 하고 뇌파를 측정했다. 한 집단은 챗봇을 쓰고, 한 집단은 검색을 쓰고, 한 집단은 아무 도구 없이 썼다. 세 차례에 걸친 결과에서 챗봇 집단은 뇌 영역 사이의 연결이 가장 약했고, 자기 글이라는 느낌도 가장 낮았으며, 방금 쓴 글에서 한 문장을 인용해 보라는 요청에도 잘 답하지 못했다.
더 눈여겨볼 대목은 네 번째 회차다. 18명을 대상으로 조건을 바꿔, 챗봇을 쓰던 사람들에게 도구 없이 쓰게 했다. 이들은 처음부터 도구 없이 쓴 사람들보다 관여가 낮은 상태를 보였다. 도구를 껐다고 해서 도구를 쓰기 전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연구진은 이를 인지적 부채라고 불렀다. 다만 참가자가 54명이고 대학생 중심이며 과제도 글쓰기 하나였으므로, 이 결과를 조직 전체로 넓혀 읽기에는 아직 이르다. 방향을 보여 주는 신호로 읽는 편이 정확하다.
도구를 덜 쓰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베인브리지의 논문이 자동화를 멈추자고 말하지 않았던 것과 같다. 그 논문의 결론은 자동화가 늘어날수록 사람의 훈련을 줄이지 말고 늘리라는 것이었다. 판단을 다루는 도구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맡기는 범위가 넓어질수록, 직접 해 보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
리더가 물어야 할 질문은 결국 하나다. 오늘 내가 통과시킨 것들 가운데, 도구가 없었다면 내가 직접 판단할 수 있었던 것은 몇 개인가. 그 수가 줄고 있다면 일이 빨라진 것이 아니라 기준이 옮겨 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