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반을 먼저 깔았다
이 글에서 '선행 기반 공사'는 본 작업이 제 속도를 낼 수 있게 먼저 까는 기반을 말한다. 수송로, 숙소, 보건, 장비가 여기 든다. 눈에 보이는 진척이 없어서 일정이 쫓길 때 가장 먼저 잘리는 공사이기도 하다.
Section Ⅰ · The Sea-Level Dream성공 방식이 실패를 불렀다
수에즈에서 통한 방식을
파나마에 그대로 가져왔다
1881년 프랑스가 파나마 운하 공사를 시작했을 때 지휘자는 페르디낭 드 레셉스였다. 수에즈 운하를 성공시킨 인물이다. 그는 파나마에도 수에즈처럼 갑문 없이 바다 높이로 곧게 파는 해수면식 운하를 고집했다. 반대하는 기술자도 있었지만 레셉스는 사람들을 설득해 냈다.
파나마는 사막이 아니었다. 산을 깎아야 했고, 우기마다 강이 넘쳤고, 파 놓은 비탈은 무너져 내렸다. 황열과 말라리아가 노동자를 쓰러뜨렸는데, 모기가 병을 옮긴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장비도 모자랐다. 프랑스 측 사망자는 2만 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1887년, 자금난에 몰린 레셉스는 마침내 설계를 갑문식으로 바꾸고 귀스타브 에펠과 갑문 공사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1889년 회사는 청산됐고, 이 사업은 19세기 최대의 금융 추문 가운데 하나로 번졌다. Vol. 02에서 본 리더십의 역설이 여기 있다. 한 번 크게 통한 방식은 다음 판에서 맹점이 된다. 수에즈의 성공이 파나마의 설계를 붙잡았다.
1902년 미국은 프랑스 회사의 권리와 장비를 4,000만 달러에 사들이기로 했고, 1904년 공사를 넘겨받았다. 첫 수석 기술자 존 월리스 아래서 굴착은 더뎠고, 1905년 봄에는 황열이 다시 번졌다. 월리스는 한 해 남짓 만에 물러났다.
Section Ⅱ · Stop Digging먼저 멈췄다
파는 일이 아닌
청소로 시작했다
1905년 7월 새 수석 기술자 존 프랭크 스티븐스가 파나마에 왔다. 미국 북서부의 험한 산악 철도를 놓아 이름을 얻은 철도 기술자였다. 그는 현장을 두고 건설 기술자에게 주어진 과제 가운데 가장 절망적인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노동자는 말라리아와 황열, 형편없는 숙소와 영양 부족에 시달렸고, 장비는 모자랐으며, 수송 체계는 망가져 있었다.
그가 처음 내린 결정은 굴착을 멈추는 것이었다. 가장 험한 구간인 쿨레브라 굴착을 잠시 세웠다. 굴착 실적을 보여 주어야 할 때 굴착을 멈춘 것이다. 그의 판단은 단순했다. 흙을 파내는 속도보다 파낸 흙을 치우는 속도가 병목이었다. 그는 운하 공사의 초기 단계를 철도의 문제로 다시 정의했다.
"굴착은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작은 일이다." (John F. Stevens · McCullough, The Path Between the Seas, 1977)
스티븐스는 파나마 철도를 다시 깔고, 흙을 실은 열차가 여러 층에서 일하는 증기삽 옆을 끝없이 오가는 궤도 체계를 설계했다. PBS의 표현을 빌리면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였고, 이 철도가 이후 운하 공사 전체의 뼈대가 됐다. 동시에 창고와 정비 공장, 부두를 짓고, 노동자가 살 숙소와 학교, 병원을 세웠다. 그는 파는 일이 아닌 청소로 일을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결정은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군의관 윌리엄 고거스는 모기가 황열을 옮긴다고 보고 방제를 주장했지만, 그 생각을 미심쩍게 보는 사람이 많았다. 스티븐스는 고거스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대 주었다. 1905년 12월, 파나마에서 황열이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남아야 운하도 팔 수 있었다.
Section Ⅲ · Change the Design설계를 바꾸고 떠났다
가장 큰 문제는
강이었다
기반을 까는 동안 스티븐스는 설계의 근본을 다시 봤다. 그가 본 가장 큰 적은 흙이 아니었다. 우기마다 범람하는 차그레스강이었다. 해수면식으로는 이 강을 다스릴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강을 막아 거대한 호수를 만들고, 갑문으로 배를 호수 높이까지 올렸다 내리는 설계를 제안했다. 하원 위원회에서 그는 통계와 지도를 들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곳 운하 공사의 가장 큰 문제는 차그레스강을 다스리는 일이라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먼저 설득됐다. 1906년 2월 루스벨트는 의회에 갑문식이 더 싸고, 더 빨리, 덜 위험하게 지을 수 있고, 뒤에 넓히기도 쉽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래도 표결은 팽팽했다. 1906년 6월 상원은 36 대 31로 갑문식을 택했고, 하원이 뒤따랐다. 프랑스가 6년을 붙들고 있다가 너무 늦게 내려놓은 설계를, 스티븐스는 부임 1년 만에 뒤집었다.
그리고 1907년, 스티븐스는 갑자기 사임했다. 이유는 지금도 분명하지 않다. 뒤를 이은 육군 기술자 조지 고설스가 공사를 끝냈고, 운하는 1914년 8월 15일 열렸다. 개통의 영광은 대개 고설스의 이름과 함께 기억된다. 그러나 미국토목학회(ASCE)의 정리대로, 스티븐스가 떠날 무렵 사업의 성공은 이미 굳어 있었다. Vol. 40에서 정조가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사람과 설계를 먼저 준비했듯, 파나마의 속도도 착공이 아닌 기반에서 나왔다.
AI 전환을 서두르는 조직에서도 같은 장면이 되풀이된다. 시범 과제의 숫자는 빠르게 늘지만, 데이터가 흐를 길과 시스템을 잇는 배관은 뒤로 밀린다. Vol. 39에서 본 보이지 않는 청구서가 그렇게 쌓인다. 흙은 계속 파는데 실어 나를 철도가 없는 셈이다.
스티븐스는 운하가 열리는 날 그 자리에 없었다. 그러나 그 운하는 그가 멈춰 세운 굴착기와, 그 대신 깐 철도 위에서 완성됐다. 리더에게 가장 어려운 결정은 무엇을 시작할지보다, 보이는 진척을 언제 멈출지일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