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아닌 틈
같은 시간 안에 들어가는 일의 양이 늘어나는 것을 말한다. 근무 시간이 길어지는 것과는 다르다. 시간표는 그대로인데 그 안의 빈 곳이 메워지는 쪽이다. 그래서 숫자로 잡히지 않고, 당사자도 한참 뒤에야 알아차린다.
Section Ⅰ · Nobody Told Them To시킨 사람은 없었다
의무가 아니었는데
왜 일이 늘었나
미국의 한 기술 회사에서 여덟 달에 걸쳐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본 연구가 있다. 직원은 약 200명이었고, 연구진은 주 2일 현장에 머물며 관찰하고, 사내 대화 채널을 따라가고, 엔지니어링과 기획과 디자인과 리서치와 운영을 아우르는 40건이 넘는 심층 면담을 했다. 2026년 2월에 중간 결과가 공개됐다.
조건 하나를 먼저 짚어 둘 필요가 있다. 이 회사는 AI 사용을 의무로 걸지 않았다. 기업용 구독을 열어 두었을 뿐이다. 평가에 반영하지도, 사용률을 보고하게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Vol. 57에서 다룬 지표의 압력이 없는 환경이었다.
그런데도 일은 늘었다. 연구진의 요약은 이렇다. 사람들은 더 빠른 속도로 일했고, 더 넓은 범위의 일을 맡았고, 하루 중 더 많은 시간대로 일을 넓혔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시키지 않았는데 스스로 일어났다. 이유는 단순하다. 더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해 보니 꽤 보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이 변화를 세 갈래로 나눴다. 첫째는 과업의 확장이다. AI가 모르는 영역을 메워 주니, 예전이면 남에게 부탁하거나 미루거나 아예 포기했을 일을 직접 손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것을 "그냥 한번 해 본다"고 표현했는데, 그 시도가 쌓여 맡은 일의 범위가 실제로 넓어졌다. 더 중요한 대목이 뒤에 있다. 예전 같으면 사람을 더 뽑거나 도움을 요청할 근거가 됐을 일까지 흡수됐다는 것이다.
그 여파는 옆자리로 갔다. 엔지니어들은 동료가 AI로 만든 결과물을 검토하고 고치고 방향을 잡아 주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됐다. 공식 코드 리뷰만이 아니라 메신저 스레드와 자리 옆 질문으로도 왔다. Vol. 39에서 본 보이지 않는 청구서가 여기서도 같은 방식으로 날아온다.
Section Ⅱ · The Loop스스로 조이는 고리
쉬는 시간이
쉬는 시간이 아니게 될 때
두 번째 갈래가 이 글의 제목이다. 일과 일이 아닌 시간 사이의 경계가 흐려졌다. AI는 시작의 마찰을 크게 줄인다. 빈 화면을 마주하거나 어디서부터 손댈지 모르는 상태를 건너뛰게 해 준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전에 쉼이던 자리에 작은 일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장면이 기록돼 있다. 점심을 먹으면서 프롬프트를 넣고, 회의 중에 넣고, 파일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넣는다. 자리를 뜨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던져 두고 나간다. 자기가 없는 동안 AI가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어느 것도 일을 더 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이 쌓이면 하루의 모양이 달라진다. 자연스러운 멈춤이 줄고, 일과 계속 이어져 있는 상태가 된다.
대화하듯 한 줄 적는 방식이 이 변화를 더 매끄럽게 만들었다. 프롬프트를 넣는 일은 업무를 시작하는 느낌보다 메시지를 보내는 느낌에 가깝다. 그래서 저녁이나 이른 아침으로 일이 넘어가는 데 특별한 결심이 필요하지 않았다. 참가자들은 대개 한참 뒤에 알아차렸다. 쉬는 시간에 프롬프트를 넣는 일이 습관이 되면서, 쉬는 시간이 예전만큼 회복을 주지 않게 됐다는 것을.
이 대목이 Vol. 33과 갈리는 지점이다. 그때는 일이 끝난 뒤의 회복을 다뤘다. 퇴근 후에 마음이 일에서 떨어져 있어야 사람이 다시 채워진다는 이야기였다. 이번 연구가 보여 주는 것은 더 작은 단위다. 하루 안에 흩어져 있던 짧은 틈이다. 그 틈은 쉬려고 만든 시간이 아니었다. 파일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시간, 회신을 기다리는 시간, 회의로 이동하는 시간처럼 일의 구조에 그냥 박혀 있던 여백이다. 아무도 그것을 자원으로 세지 않았기 때문에, 사라져도 아무도 세지 않았다.
연구진은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고리로 맞물린다고 정리한다. AI가 어떤 일을 빠르게 해 준다. 그러면 속도에 대한 기대가 올라간다. 기대가 올라가면 더 기대게 된다. 더 기대면 손대는 범위가 넓어진다. 범위가 넓어지면 일의 양과 밀도가 다시 늘어난다. 참가자 한 사람의 말이 이 고리를 요약한다. 더 생산적이라고 느꼈지만, 덜 바쁘지는 않았다.
Section Ⅲ · Build a Practice관행을 만든다
절제하라는 말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연구진이 분명하게 선을 긋는 대목이 있다. 직원에게 알아서 조절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는 앞의 고리에 있다. 일을 늘린 것은 게으름도 욕심도 아니었다. 더 할 수 있게 됐다는 감각과, 그래서 더 한 것이 실제로 보람 있었다는 경험이었다. 개인에게 맡기면 가장 의욕적인 사람이 가장 먼저 소진된다.
대신 제안된 것이 조직 차원의 AI 관행이다. 어떻게 쓸지만이 아니라 언제 멈추는 것이 적절한지, 그리고 새로 생긴 능력에 맞춰 일을 어디까지 넓히고 어디부터는 넓히지 않을지를 정해 두는 규범이다. 위의 사다리에 적은 세 가지가 그 내용이다.
이 처방이 Vol. 59와 이어진다. 거기서 본 것은 관리라는 일이 아래로 퍼진다는 이야기였고, 새로 생긴 관리 시간을 업무량으로 잡아 주지 않으면 사람이 조용히 소모된다는 경고였다. 이번 연구는 그 소모가 어떤 모양으로 일어나는지를 현장에서 보여 준다. 늘어난 것은 눈에 띄는 야근이 아니라 눈에 띄지 않는 밀도다.
연구의 한계도 함께 적어 둔다. 한 회사에서 여덟 달을 지켜본 질적 연구이고, 연구진 스스로 진행 중인 작업이라고 밝히고 있다. 수치로 일반화할 자료가 아니다. 다만 기술 회사 한 곳에서 관찰된 이 장면이 낯설지 않다면, 그 낯익음 자체가 신호다.
마지막으로 리더가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만 고르자면 세는 것이다. 지난주에 팀원들이 점심시간과 회의 사이와 퇴근 직전에 몇 번이나 프롬프트를 넣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 분기에 새로 맡게 된 일이 무엇인지, 그 일이 예전에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물어보면 금방 나온다. 범위가 넓어진 사람이 가장 먼저 밀도를 떠안은 사람이다.
이 연구가 불편한 이유는 악역이 없다는 데 있다. 회사는 강요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열심히 했고, 결과물은 늘었다. 각 단계에서 아무도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는데 하루는 조금씩 빽빽해졌다. 이런 종류의 변화는 누가 막아야 한다고 정해 두지 않으면 아무도 막지 않는다.
리더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렇다. 우리 팀의 하루에는 아직 틈이 남아 있는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직 메우지 않아서가 아니라, 누군가 지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