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이게 만드는 데 3년이 걸렸다
이 글에서 '도입 설계'는 새로 만든 것이 실제로 쓰이게 되기까지 필요한 일을 미리 짜는 것을 말한다. 작은 팀으로 먼저 써 보기, 반대에 답하기,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적기, 쓰는 사람의 이해가 걸린 제도에 넣기가 여기 든다. 만드는 일은 도입의 첫 단계일 뿐이다.
Section Ⅰ · Try It First먼저 써 보았다
창제 두 달 만에
실제 일에 썼다
『세종실록』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기사는 짧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해야 글자를 이루고, 한자로 된 말과 우리말을 모두 쓸 수 있으며,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
기록은 거기서 끝나지만 일은 거기서 시작됐다. 세종은 이 글자를 곧바로 반포하지 않았다. 해례본이 나오기까지 2년 9개월, 관리 선발 시험에 넣기까지는 꼭 3년이 걸렸다. 그 3년 동안 한 일을 순서대로 놓으면, 오늘 조직이 새 도구를 들일 때 건너뛰기 쉬운 단계들이 보인다.
첫 단계는 써 보는 것이었다. 창제 기사가 나오고 두 달이 채 안 된 1444년 2월 16일, 세종은 집현전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이선로·이개, 돈녕부 주부 강희안에게 새 글자로 중국 운서 『운회』를 번역하게 했다. 동궁과 진양대군, 안평대군이 그 일을 관장했다. 소수의 젊은 학자로 꾸린 팀에게, 새 글자가 한자음을 정확히 옮길 수 있는지 실제 텍스트로 시험하게 한 것이다.
이듬해에는 규모를 키웠다. 1445년 4월 권제·정인지·안지 등이 조선 건국의 내력을 노래한 125장의 『용비어천가』를 지어 올렸다. 새 글자로 된 첫 장편이었다. 짧은 음 표기를 넘어 긴 글을 새 글자로 쓸 수 있는지, 왕조의 공식 문헌에 올릴 만한지를 보여 주는 시연이었다. 이 책은 주해를 더해 1447년에 간행됐다.
Section Ⅱ · The Petition반대에 답했다
반대는 집현전 안에서
나왔다
운서 번역을 맡긴 지 나흘 뒤인 1444년 2월 20일, 반대 상소가 올라왔다. 이름을 올린 이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 부수찬 송처검, 저작랑 조근. 모두 집현전 학자였다. 새 글자를 만든 조직의 한가운데서 반대가 나온 셈이다.
상소의 논점은 분명했다. 중국과 글과 법도를 같이하는 때에 따로 글자를 만드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설총의 이두는 비록 야비한 말이지만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려 쓴 것이라 한자와 떨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가장 현실적인 걱정이 이어졌다. 사람들이 "27자의 언문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할 수 있다고 할 것이오니, 무엇 때문에 성리의 학문을 궁리하려 하겠습니까." 새 도구가 기존 전문성의 값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오늘 AI를 두고 나오는 걱정과 구조가 같다.
세종은 상소자들을 불러 상소를 읽게 한 뒤 논점마다 답했다. 이두를 두고는 이렇게 받았다.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세종실록, 세종 26년 2월 20일)
반대자가 내세운 선례의 목적을 되물어 자기 사업의 목적과 같은 자리에 놓은 답이다. 음운의 전문성을 두고는 더 직접적이었다. "네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 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공정하게 적어 두어야 할 대목도 있다. 세종은 논쟁만 하지 않았다. 상소자 7인을 의금부에 가두었다가 풀어 주었고, 정창손은 파직했으며, 앞뒤 말을 바꾸었다는 김문은 국문하게 했다.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반대자에게 불이익을 준 대목이다. 그럼에도 이 기록이 남긴 것은 무겁다. 왕의 역점 사업에 신하들이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 있었고, 왕은 그 반대를 불러 논점으로 답했으며, 그 전 과정이 실록에 적혔다. Vol. 44의 바사호에서 누구도 왕에게 시험 결과를 전하지 못한 것과 대비된다.
Section Ⅲ · Make It Stay쓰이게 만들었다
설계 원리를 적고,
시험에 넣었다
1446년 9월,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왔다. 세종이 쓴 서문과 예의 뒤에, 정인지와 최항·박팽년·신숙주·성삼문·강희안·이개·이선로가 글자의 원리와 쓰임을 풀이한 해례를 붙였다. 이 책이 사용 설명서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글자를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를 적었기 때문이다. 어떤 원리로 자음과 모음의 꼴을 만들었는지, 어떻게 합쳐 소리를 이루는지를 풀고 실제 낱말 용례까지 붙였다.
정인지는 뒤에 붙인 글에서 이 글자의 쓰임을 이렇게 적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바람 소리와 학의 울음소리, 닭 울음소리나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 있게 되었다." 배우기 쉽고 무엇이든 적을 수 있다는 것, 새 도구를 들일 때 사람들이 가장 먼저 묻는 두 질문에 대한 답이다.
석 달 뒤인 1446년 12월 26일, 세종은 이조에 명을 내렸다. 앞으로 하급 관리를 뽑는 이과와 이전의 취재에서 훈민정음도 함께 시험하되, "비록 의리는 통하지 못하더라도 능히 합자하는 사람을 뽑게 하라." 새 글자를 배우면 벼슬길이 열리는 자리에 넣은 것이다. 기준은 일부러 낮췄다. 깊은 뜻까지 알 필요 없이 글자를 모아 쓸 줄만 알면 됐다.
이 해례본은 오래 잊혔다가 1940년에야 세상에 다시 나왔다. 그 전까지 글자의 원리를 두고 여러 추측이 오갔다. 지금 해례본은 국보이자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라 있다. Vol. 40에서 본 정조의 의궤가 어떻게 지었는지를 적은 기록이라면, 해례본은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를 적은 기록이다. 둘 다 없으면 다음 사람은 결과만 물려받고 이유는 잃는다.
오늘 많은 조직이 AI 도구를 들이면서 첫 단계에서 멈춘다. 라이선스를 사고, 공지를 보내고, 교육을 한 번 한다. 그리고 몇 달 뒤 사용률을 보고 놀란다. 세종의 순서로 보면 빠진 단계가 보인다. 작은 팀이 실제 일로 먼저 써 보는 일, 내부 전문가의 반대에 답하는 일, 왜 이렇게 쓰는지 적는 일, 그리고 쓰면 이득이 되는 제도에 넣는 일이다.
문자를 만든 것은 하루의 일이 아니었지만, 쓰이게 만든 것은 3년의 일이었다. 리더의 성과는 만든 날보다, 만든 것이 쓰이기 시작한 날로 재야 한다.